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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M 이슈/GPM People

‘재미난 변화’이며 ‘소중한 변화’



Global PeaceMakers Nepal Camp 2009

임 수 진


GPM 그리고 네팔, 2009


처음 GPM CAMP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9년, 대외활동에 관심을 갖던 대학교 2학년 때입니다. 제 전공이 간호학인데 간호학과라는 특성상 대학시절의 봉사는 향후 취업에 있어서도 필요하기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독거노인 방문 봉사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내에서 지원을 해주는 GPM CAMP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이색적인 봉사 경험과 스펙이 되어 줄 것 같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GPM CAMP를 신청할 때만 해도 해외봉사를 통해 새로운 봉사를 경험해보고자 했던 마음보다는 ‘이 기회에 해외에 한번 나가보자.’하는 마음이 그 나이 먹도록 비행기 한번 안 타본 저로서는 더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품고 다녀온 해외봉사지 네팔에서 저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봉사를 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가 가게 되는 나라는 저희가 생각하는 상대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보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나라로 가게 됩니다. 제가 다녀온 네팔이라는 나라에서 처음 공항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낡고 오래된 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무질서하게 도로를 질주하고 사람들은 헤지고 때 묻은 옷을 입고 다니며 곳곳에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들이 보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 저는 그곳, 네팔을 ‘가난한 나라’라고 정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가난한 나라’에서 하루하루 행복이 커져가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학교며 길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모두 커다란 눈동자로 해맑은 미소를 건네 왔고 저도 그 아이들과 함께 해맑은 미소를 매일같이 지었습니다. 홈스테이를 하기 위해 학교 친구들과 하교를 하는 길에는 참새 같은 아이들과 재잘거리며 손을 잡고 얼마나 신이 나게 걸었던지 두 시간이 걸렸는데도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라면 매일 밤을 좁고 네모난 방 안에서 남자친구와 문자를 하며 보냈을 텐데 그 ‘가난한 나라’에서는 사람들과 밖으로 나와 정전이 된 도시 뒤로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메운 반딧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가난한 나라’에서 하루하루 느끼는 행복은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낯선 행복에 매료되어 저의 내일이 많이 달라질 거라는 것을요. 





그리고 아프리카


아프리카를 가게 되기까지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경제적인 문제와 더불어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어하다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돈을 벌며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집안이 넉넉지 않아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휴학을 하고 1년 동안 돈을 벌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그제야 ‘하고 싶은 것’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쯤 저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1년만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에 써보자.’하고 말이죠. 그리고 떠오른 것이 ‘아프리카’였습니다. 17살, 처음으로 간호사의 꿈을 품게 해 주었던 것이 제게는 아프리카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안타깝게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품게 된 꿈이 간호사였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제게 꿈을 만들어준 더 커다란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두려움 없이 실행에 옮기게 도와준 것이 GPM CAMP였습니다. 짧게나마 GPM CAMP를 통해 해외봉사에 대해서 경험할 수 있었고 커다란 배움들을 얻었기에 아프리카로 떠나는데 걱정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프리카로의 도전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미국의 봉사자 교육학교인 IICD(Institution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Development)를 거쳐 아프리카의 모잠비크라는 나라로 가게 되며 이룰 수 있었습니다. 모잠비크는 현재 전 세계에서 젊은 연령대의 HIV 보균자가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이기에 국제 NGO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저도 그곳에서 ‘에이즈 예방 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재미난 변화’이고 ‘소중한 변화’


 ‘재미난 변화’를 들자면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출몰해도 더 이상 여성스럽게 소리 지르지 않고 남자친구나 아빠의 도움 없이 혼자 처리할 수 있다는 것과 클렌징크림이나 폼클렌징 없이 빗물로 10분 내 샤워를 끝낼 수 있는 것, 그리고 삭발한 머리로 여자들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당당하게 여자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 등입니다.

이상은 조금은 충격적이면서 ‘재미난 변화’이고 ‘소중한 변화’를 이야기하자면 사실 너무나 많습니다. 가장 처음 깨달은 변화는 온전한 나의 시간과 풍요로운 자유를 통해 나 자신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끝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 빠르게 쳇바퀴 돌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아름다운 땅 미국에서 보낸 반년의 시간과 세상의 끝이자 시작인 아프리카에서의 반년은 잊지 못할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땅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곳의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도 한몫을 하였지만 그 땅을 진정으로 빛나게 만든 것은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절뚝거리는 발로 제게 다가와 5달러를 건네며 좋은 일에 써달라던 아저씨, 먹을 것을 나누어주던 공원의 노숙자 할아버지, 머리카락을 잘라 학교가 먼 아이들에게 공책과 연필을 사다 준 소녀, 깨끗한 물이 없는 마을에 우물을 파주고 학교가 없는 마을에 학교를 지어준 청년, 말라리아로 삼일 만에 세상을 떠난 23살 밖에 되지 않은 봉사자.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세상 안에서 그들의 사랑을 조건 없이 나누는 모습을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나를 더 나아가 내가 아닌 다른 이들까지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경험이 가져다준 가장 소중하고 커다란 변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중한 변화를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삶에 대한 가치관과 생각들의 변화입니다.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지금까지 제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의 부질없음과 제가 소홀히 여겼던 것들의 감사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제 삶의 행복의 기준을 달라지게 하였고 그 행복은 너무나 소소한 것이기에 앞으로 평생 동안 제 삶을 아주 작은 힘으로도 행복하게 해 줄 것입니다.

           

다시금 GPM CAMP 매니저로


이제껏 봉사, 그 자체에만 신경을 쓰며 봉사를 했더라면 사실 매니저의 자리는 내가 직접 봉사를 행하기 이전에 인솔해 가는 학우들의 더 나은 봉사를 위해 힘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우들에게 신경을 쓰면서도 제 앞에 다가와 환하게 미소 짓는 그곳의 아이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매니저의 일을 하며 ‘나의 봉사’에만 익숙한 상태에서 매니저의 정확한 역할이 확립되지 않아 개인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저희 학우들이 보여주었던 믿음과 신뢰를 믿고 ‘나의 봉사’에도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의 행동이 만약 다른 직종이나, 회사 안에서 였다면 직무 태만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함께 하고 있는 이 일이 ‘봉사’이기에 아마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까지 봉사자로 활동해왔을 때는 그저 봉사가 좋아서 개인으로서 활동을 했었습니다. 개인이었기에 더 자유로울 수 있었고 부담이라고 해야 할지 책임감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한 무게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매니저의 위치에 서게 되자, 제일 먼저 다가온 것은 무게감이었습니다. 매니저의 자리가 봉사자들을 위한 자리이다 보니 ‘나의 봉사’라는 울타리를 넘어 내가 인솔해야 할 모든 이들의 봉사를 바라볼 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의 틀을 깨어야 했고 멀리 내다보고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듯 하지만 때론 한 발작 앞에서 때론 한 발작 뒤에서 걸어가야 하는 일이 사실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보람 또한 컸던 것 같습니다.


현실이 될 수 없다던 두가지 나의 꿈에 대한 이야기


 저에게는 꿈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작은 손안에서 소중한 생명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온기를 줄 수 있는 훌륭한 간호사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시 은하수 아래에서 춤을 추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럴 듯하고 크게 어렵지 않은 꿈처럼 보이실 거고 또 하나는 무슨 말인지 의아한 꿈으로 보이실 겁니다. 제게 첫 번째 꿈은 너무나 다가가기 어렵고 먼 길이며 두 번째 꿈은 지금 가지고 있는 욕심들을 내려놓고 다가가야 할 소박한 꿈입니다. 제가 저의 이 꿈들을 이야기하면 열이면 열, 저의 두 번째 꿈은 결코 소박하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그 열 분이 생각하시기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저의 가치관 안에서는 두 번째 꿈이 품고 있는 행복이 저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저의 꿈은 지난날, 저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걱정할 만큼의 엄청난 꿈이 아니며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따뜻한 손을 가진 간호사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을 가지고 은하수가 있는 땅으로 떠날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장벽이 생각 보다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의 이 두 꿈을 모두 다 이루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제 자신을 믿습니다.     


----- 자신의 소중한 이야기와 사진을 아낌없이 나눠준 임수진 봉사자, 매니저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편집자)